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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이광수 일설 춘향전 전문

by 스티디 2020. 2. 15.



1. 緣分(연분)

 
1
"여바라 방자야!"
 
2
하고 책상 위에 펴 놓은 책도 보는 듯 마는 듯 우두커니 하고 무엇을 생각하고 앉았던 몽룡(夢龍)은 소리를 치었다.
 
3
"여이."
 
4
하고 익살덩어리로 생긴 방자가 어깨짓을 하고 뛰어 들어 와 책방 층계 앞에 읍하고 선다.
 
5
몽룡은 책상 위에 들어오는 볕을 막노라고 반쯤 닫히었던 영창을 성가신 듯이 와락 밀며,
 
6
"얘, 너의 남원 고을에 어디 볼 만한 것이 없느냐?"
 
7
방자는 의외에 말을 듣는 듯이 고개를 숙인 대로 눈을 치 떠서 물끄러미 몽룡을 치어다보더니,
 
8
"소인의 골엔들 어찌 볼 만한 곳이 없을 리가 있읍니까.
 
9
산으로 가오면 나물 캐는 것도 볼 만하옵고, 들로 가오면 농사짓는 것도 볼 만하옵고, 우물로 나가오면 여편네들 물 길어 놓고 밥솥에 밥 눗는 것도 다 잊어버리고 수다 늘어 놓는 것도 볼 만하옵고, 또 행길로 나가오면 술주정군이 술 주정하는 것, 술취한 남편 붙들고 내외 싸움하는 것도 볼 만하옵고......"
 
10
"에라 이놈아!"
 
11
하고 몽룡은 괘씸한 듯이 책상을 딱 치며, 누가 그런 소리 너더러 줏어대라드냐. 어디 경치 볼만한 곳이 있느냐 말이다—어 그놈.
 
12
"네? 그렇거든 애시에 그렇게 말씀하실 께지 소인인들 힘 들여 번 밥 먹은 기운을 헛소리에 다 써버리고 싶을 리가 있겠읍니까...... 소인의 골에 경치 볼 만한 곳으로 말씀하오 면 북문 밖에 조종산성 좋다 하옵고 서문 밖에 관왕묘도 그 럴 듯하다 하오나 제일 이름이 높기로는 남문 밖 나서서 광 한루와 오작교온데 경개 절승하옵니다. 과시 삼남에 제일 명승지라 할 만하옵지요."
 
13
"광한루라 광한루, 오작교 오작교."
 
14
하고 몽룡은 혼자 입속으로 불러 보더니,
 
15
"얘, 광한루 오작교 이름이 좋다—광한루로 나가자. 나귀 안장 지어라."
 
16
이 말에 크게 놀라는 듯이 방자가 껑충 뛰며,
 
17
"도련님, 큰일날 말씀 마시오—뉘 밥줄을 끊고 다리 마댕 이를 분지르실 양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오? 사또게서 들으 시면 마른 하늘에 벼락이 내릴 것이요...... 또 공부하시는 도 련님이 공부나 하실 게지 좋은 경치는 찾아 무엇하시려 요."
 
18
하고 바로 몽룡을 경계하는 어조다. 서로 상하의 구별을 잊고 그만큼 친해진 것이다.
 
19
"공부하는 사람은 경치 구경도 못 간다드냐. 좋은 경치를 대하여야 좋은 글이 나오는 것이다—네가 무엇을 알겠느냐.
 
20
사또 분부는 내 수쇄하마. 어서 나귀 안장 짓고 공방 주모 관청빗 불러서 자리와 술과 안주 준비하라고 일러라."
 
21
하고 몽룡은 벌써 일어나서 옷을 입는다.
 
22
몽룡은 생명주 겹바지에 당베 중의 받쳐 입고 옥색 항라 겹저고리 옷고름에 약랑을 차고 남갑사 수향배자에 옥단추 를 달아 입고 당모시 중추막에 생초 긴 옷을 받쳐 입고 송 금단 허리띠에 모초 단 두리낭자 주황당사 벌매듭 끈을 달 아차고 널찍한 자주갑사 띠를 느슨히 매었는데 나귀가 걸음 을 빨리 걸을 때마다 띠끝이 석웅황 박은 숙갑사 토막 댕기 와 어울려서 펄펄 날린다.
 
23
"사또 자제 사또 자제."
 
24
하고 나귀가 지나가면 길가 사람들이 모두 부러운 듯이 우 러러본다. 오늘이 오월 단오라 울긋불긋 새옷 입은 아이들 은 떼를 모아 몽룡의 나귀를 따라온다. '사또자제 이 도령 이 얼굴 잘생기고 재주 있다' 하는 것은 남원 부내에서 모 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희고 넓은 이마, 광채 있는 눈, 높은 코하며, 후리후리한 키하며, 아직 나이는 열 여섯 살이 라 애티는 있지마는 과연 호남자의 풍격이 있었다.
 
25
사람들이 자기를 모두 우러러볼 때에 몽룡도 기뻤다. '잘 났다' '재주 있다' 하는 말을 어려서부터 들어온 몽룡은 조선 팔도에 자기가 으뜸인 것같이 생각하였고 장차 자기는 글 잘하고 벼슬 높은 사람이 되어 이름이 크게 떨칠 것을 스스로 믿었다.
 
26
몽룡은 의기 양양하여 일부러 나귀를 천천히 천천히 몰고 분홍당지 숭두선을 헌거로이 부치면서 광한루로 향하였다.
 
27
광한루는 처음에는 잘 지었던 모양이나 매우 퇴락하여서 단청도 다 벗겨지고 기왓고랑에 묵은 풀이 우거지었으며 마 루청 널조차 여기저기 떨어져 버렸다.
 
28
몽룡은 방자가 자리를 까는 동안에 마루로 이리저리 거닐 며 사방의 경치도 바라보고 들어와 벽에 붙인 글귀와 지나 간 사람들의 성명 새겨 붙인 것도 보더니 매우 볼 만한 듯 이,
 
29
"여봐라 방자야!"
 
30
하고 방자를 부른다
 
31
"여이."
 
32
광한루라고 이름만 좋았지 어디 좋은 것 있느냐. 네가 이 것을 삼남 제일 승지라 하니 과연 상놈의 눈이다.
 
33
방자는 몽룡의 얼굴에 볼만한 빛이 있는 것을 보고 가장 수심된 듯이 두 어깨를 축 늘이고,
 
34
"그러길래 소인이 여쭈었지요—공부하시는 도련님이 가만 히 글이나 읽고 계실 것이지 승지 찾으시기 당치 않다고......
 
35
아직 도련님께서 경치 보시는 눈이 열리지를 못하셨으니까 .."
 
36
하고 손으로 뒤통수를 긁으며 혀를 끌끌 찬다.
 
37
몽룡은 기감 막혀 웃으며,
 
38
"어디 경치 잘 보는 네 이야기 좀 들어 보자—네 눈에는 광한루가 그렇게 좋으냐."
 
39
"좋다 뿐이겠소?"
 
40
하고 방자는 혹은 왼편 팔을 들어 왼쪽을 가리키고 혹은 오른편 팔을 들어 오른쪽을 가리키고 혹은 고개를 번쩍 들 어 하늘을 우러러보며 혹은 손가락을 빳빳이 해가지고 땅을 가리키면서 노랫가락으로 광한루의 좋은 연유를 설명한다—
 
41
"가까운 산은 초록이요 먼 산은 퍼렁이요 훨쩍 더 먼 산 은 회색이라. 가까운 산에 아지랑이요 먼 산에 안개오니 동 남서 삼방으로 둘러 선 첩첩 산이 그 아니 좋사오며, 일망 무제 넓은 들에 물 있으면 논이 되고 물 없으면 밭이 되어 도련님네 같으신 양반님네 진지 짓는 벼며 소인네 같은 상 놈들이 먹는 밥이 되는 조와 피와 보리, 밀 파릇파릇 자라 나니 그 아니 좋은 경치오며, 꽃 피는 산을랑 등에 지고 붕 어 메에기 송사리떼 노는 개천을랑 앞에 두고 무거운 기와 도 말고 끌어 오기 어려운 돌도 말고 가볍고 아무 데나 있 는 풀과 흙으로만 지은 농가가 둘씩 셋씩 셋씩 둘씩 조는 듯이 꿈꾸는 듯이 배부른 송아지들처럼 풀 속에 누웠느니 그 아니 절묘한 경치오며, 눈을 들어 우러러보오면 연옥색 하늘에 양떼 같은 구름 점이 오락가락 널려 있고 이따금 이 렇게 서늘한 바람이 슬슬 불어와 소인의 등에 맺힌 향기로 운 땀을 씻어 가니 그 아니 상쾌한 경치요? 게다가 이름조 차 광한루에 좋은 술과 안주까지 있으니 이런 좋은 경치가 또 있겠소? 어깨춤이 절로 나네, 좋을 좋을 좋을씨고."
 
42
하고 얼씬얼씬 춤을 춘다.
 
43
"허, 그놈!"
 
44
하고 말없이 듣던 몽룡은 방자의 어깨를 툭 치며,
 
45
"얘, 너 그런 재담을 다 어디서 배웠니?"
 
46
방자 춤추기를 그치고 시치미를 뚝 떼며,
 
47
"말씀이야 바로 소인의 고을에 무슨 그리 좋은 경치가 있 겠읍니까. 그러하오나 다 보는 눈에 있사옵지요—소인같이 천줄 곰보 만줄 곰보로 빡빡 얽어맨 주제도 소인의 계집의 눈에는 선풍 도골로 보이는 모양으로 이만한 경치도 보시는 눈을 따라 과히 안 좋지는 아니하옵지요."
 
48
"과연 네 말이 유리하다—네 말과 같이 광한루를 천하 제 일 승경으로 치고 술이나 먹고 놀자."
 
49
하고 몽룡이 먼저 자리에 앉아,
 
50
"여바라, 너희들도 다들 올라 앉아라. 우리 오늘은 상하의 별 다 걷어 치우고 모두 친구가 되어서 특고 놀자. 자 다들 올라 앉아라."
 
51
이 말에 방자가 먼저 몽룡이 맞은편에 펄썩 앉으며,
 
52
"도련님이 오르라시니 오르려무나."
 
53
하고 어깨를 으쓱한다.
 
54
"아니다!"
 
55
하고 몽룡은 손을 들어 자기에게 권하는 술잔을 막으며,
 
56
"향당에는 막여치라니 좌중에 누가 제일 나이가 많으냐— 우리 나이 차례로 순배를 하자."
 
57
방자가 좌중을 휘둘러 보더니,
 
58
"아마, 이 후배놈이 제일 연장자일 듯하오. 보기에는 요렇 게 땅딸보라도 정녕 마흔 살은 넘었을 것이요."
 
59
"어 그러면 내게 존장은 넉넉하구나. 첫잔은 후배에게로 돌려라."
 
60
하고 몽룡이 손수 술잔을 들어 후배를 권한다. 본래 용렬 한 후배는 도련님의 손에서 술잔을 받는 것이 너무도 송구 하여 잔 잡는 손이 벌벌 떨린다.
 
61
"이놈아, 이것은 강신을 하느냐 술은 왜 엎질러?"
 
62
하고 방자가 자기 옷에 떨어진 술방울을 떨어 버린다.
 
63
한 순배 두 순배 쉴 새 없이 돌아서 병에 술도 거의 다 하 고 안주 그릇도 하나씩 둘씩 비었다.
 
64
안주라야 과일포, 암치, 문어 따위에 불과하건마는 그런 것 을 좀체는 얻어 먹어 보지 못하던 판이라 모두 접시굽을 핥 을 지경이었다. 몽룡의 얼굴에 홍훈이 돌고 숨결이 빨라진 다. 용렬한 후배도 술잔이나 들어가니 몽룡이를 두려워하는 마음도 줄고 제법 고갯짓을 하며 떠든다. 제비 한 쌍이 처 마 밑으로들었다 나왔다 하는 것을 보고 후배는 흥에 못 이 겨하는 듯이,
 
65
"강남 갔던 구제비야 옛집 찾아 예 왔느냐 옛집은 예 있건만 옛 사람은 간 곳 없네 압다 너도 술이나 한 잔 먹어라."
 
66
하고 제 잔에 먹다 남은 술을 제비를 향하여 뿌린다.
 
67
"좋다!"
 
68
하고 방자가 젓가락으로 장단을 친다.
 
69
몽룡은 슬며시 자리를 떠나 난간에 지혀앉아서 담배를 피 웠다. 네 사람은 여전히 술병을 기울이고 웃고 떠든다.
 
70
몽룡은 심신이 상쾌하여 이리저리 경치를 바라볼 적에 오 작교 저편 큰길 건너 늙은 수양버들 밑에서 녹의 홍상으로 차린 처녀 삼사인이 그네를 뛰는 양을 보았다. 치맛자락이 펄렁 댕기 끝이 너훌 앞으로 굴러 뒷가지를 차고 뒤로 굴러 앞가질르 찰 때에 흐느적 흐느적 흔들리는 수양버들 잎사귀 가 햇빛에 번뜻번뜻한다.
 
71
처녀들이 그네 뛰는 것을 처음 보는 것이 아니언마는 오늘 따라 몽룡은 심사가 산란함을 깨달았다. 더구나 그네 뛰는 처녀들 중에 분홍 치마 노랑 저고리 입은 한 처녀가 이상하 게 몽룡의 맘을 끌었다. 동안이 뜨므로 그 얼굴까지는 볼 수가 없으나 그네 위에서 몸 가지는 태가 다른 처녀와는 유 별하게 아름답다.
 
72
『그네를 뛰는 것이 아니라 춤을 추는 것이로구나.』 —몽룡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담배도 잊어버리고 몽룡은 그 처녀만 뚫어지게 바라보노라니 가슴은 두근거리고 눈은 아 뜩아뜩하였다.
 
73
견디다 못하여,
 
74
"여봐라!"
 
75
하고 몽룡은 방자를 불렀다.
 
76
"도련님, 담뱃불에 중추막 타오."
 
77
하고 방자가 몽룡의 중추막 자락을 걷어 치운다.
 
78
"얘 저게 누군지 아느냐?"
 
79
하고 몽룡은 중추막 자락 타는 것은 본 체도 아니하고 부 채로 그네 맨 수양버들을 가리킨다.
 
80
눈치 빠른 방자는 얼른 몽룡의 뜻을 알아차렸다—허기는 그 럴 나이가 되었는데 하고 빙끗 웃었으나 일부러 시치미 뚝 떼고,
 
81
"그것은 보따리를 지고 가는 것을 보니 아마 먼길 가는 행인인가 보오."
 
82
"아니! 그것 말고 저것 말이다—저기 저것 말이어!"
 
83
"네 그것은 아마 엿장산가 보오."
 
84
"에익 그놈!"
 
85
하고 몽룡은 화를 내어 벌떡 일어나서 부채는 걷어 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86
"저기 저 지금 그네에서 내리는 저 처녀 말이다."
 
87
"어허 도련님! 공부하시는 도련님이 남의 여자만 바라보 시고 담뱃불에 옷 타는 줄도 모르니 참 딱한 일이요."
 
88
하고 방자가 머리를 쩔레쩔레 흔들며,
 
89
"오늘이 오월 단오날이오니 여염집 계집아이들이 그네 뛰 는 것이옵지요."
 
90
"아니다. 네가 모른다. 닭의 떼에 학처럼 뛰어나는 저 계 집아이가 예사 계집아일 리 만무하다."
 
91
"도련님도 취하셨소. 여기서 이렇게 보고 학인지 따옥인 지 어떻게 아신단 말이요. 당년한 계집애들은 먼발치서 보 면 다 미인같이 보입니다. 가까이 가 보면 다 그렇고 그렇 지요."
 
92
"아니다. 그렇고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 네 눈에는 저 네 계집아이가 다 같이 보인단 말이냐?"
 
93
하고 몽룡은 화증을 낸다.
 
94
"소인 보기에는 다 같은 걸요."
 
95
하고 방자가 고개를 돌려대고 픽 웃는다.
 
96
몽룡은 물끄러미 그네터를 바라보며,
 
97
"어허, 눈에도 상목 반목이 있어서 상놈은 눈도 양반만 못하단 말이냐—네 한 번 더 자세히 보아라. 저기 저 분홍 치마에 노랑 저고리 입고 지금 막 그네를 뛸 양으로 줄을 갈라 쥐고 한 발을 올려 놓는 저 아가씨를 보아!"
 
98
방자도 몽룡이가 가리키는 곳을 이윽히 보는 체하더니 이 제야 알아본 듯이 손벽을 딱 치며,
 
99
"네. 저애 말씀이시오?"
 
100
"그래 네가 그 애를 아느냐?"
 
101
"네 그애 말씀이야요? 나는 누구라고...... 그애 같으면 안 다 뿐이겠소. 소인이 길러내다시피 한 계집앤 걸요...... 아이 똑똑하지요. 매우 얌전할 걸요."
 
102
"이놈아, 길러내기는 네가 나이가 몇 살인데 길러내어?"
 
103
"네. 소인의 나이가 지금 갓서른이요. 남과 같이 돈냥이나 있어서 일찍 장가만 들었더면 저만한 딸을 둘은 두었겠 소."
 
104
몽룡은 다시 난간에 지혀앉고 방자의 소매를 끌어 곁에 가 까이 앉히며 나직한 어조로,
 
105
"얘, 아무리 보아도 그 아가씨가 범상한 여자가 아니다.
 
106
네가 길러냈다 하니 너는 그를 잘 알리라—대관절 그가 누구 냐?"
 
107
하고 은근히 묻는다.
 
108
"미상불 도련님 눈도 어지간 하시오. 그 애는 본읍 퇴기 월매의 딸 춘향이라 하옵는데, 절대 가인은 마치 모르겠소 마는 우리 호남 제일 미인이라고 소문이 장히 높지요—어지 간하지요."
 
109
"오, 그러면 기생이로구나."
 
110
"아니요, 기생은 아니지요. 대비 바치고 속량하여 기안에 이름을 어였으니 기생은 아니요."
 
111
기생 아니란 말에 몽룡은 잠깐 머쓱하더니,
 
112
"얘."
 
113
"네."
 
114
"그 어찌 좀 불러 올 수 없을까."
 
115
"누구를요?"
 
116
"춘향이 말이다."
 
117
"춘향이를 이리로 부르셔요?"
 
118
하고 방자는 펄쩍 뛰며,
 
119
"어림도 없소. 그 계집아이가 양반의 씨라고 도고하기가 백두산 꼭대기 같아서 앉아서 도련님을 부를 지경인데 그 계집애를 불러 와요? 어림도 없는 일은 생념도 마시오."
 
120
몽룡은 더욱 숨결이 높으며,
 
121
"그렇게 도고하냐?"
 
122
"두 말하면 헛말되지요. 관속 건달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 와 호남에 누구누구하는 양반님네 선비님네도 수없이 얼러 본 모양입니다마는, 그 애가 거들떠 보기는커녕 대문 안에 들여를 놓아야 정하배라도 하지요—나들 대문에 붙인 입춘만 바라보고는 뒤통수 치고들 돌아갔나 봅디다."
 
123
하고 진저리가 나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124
분홍 치마는 여전히 오르락 내리락, 버들가지는 흐느적 흐 느적 몽룡의 가슴은 갈수록 설렌다.
 
125
"얘, 네가 내 맘을 졸이노라고 거짓말을 하나 보다. 아무 러기로 그대도록 도고하랴."
 
126
하고 몽룡은 눈치를 보려고 곁눈으로 방자의 얼굴을 보았다.
 
127
방자는 성난 듯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128
"소인이 거짓말 아니하는 줄은 도련님도 아시겠소 그려.
 
129
소인은 거짓말을 하면은 듣는 사람이 거짓말인 줄 알 리 만 치 하옵지 듣는 사람이 속을 거짓말은 일생에 한 일이 없 소. 그러니 아예 춘향이 불러 오실 일은 생념도 마시고 그 만치 노시었으면 들어가십시다—또 사또께서 걱정하시리 다."
 
130
하고 하인들을 돌아보며,
 
131
"얘들아 도련님 들어갑신다. 나귀 내고 자리 치워라."
 
132
하고 제 맘대로 분부를 한다.
 
133
몽룡은 짐짓 성을 내어 담뱃대로 마룻바닥을 두드리며,
 
134
"이놈아, 내가 불러오라면 불러 올 게지 웬 잔말이냐."
 
135
하고 소리를 높인다.
 
136
방자는 마지못하여 하는 듯이 시무룩하여 그네터를 향하고 건너간다. 버들가지 하나를 심술궂게 뚝 꺾어서 잔가지를 우지끈 우지끈 다 다듬어서 거꾸로 집고 군노사령의 걸음 본으로 충충충 걸어간다. 오작교 큰길 건너 잠깐 집모퉁이 에 들어 안 보이더니 그네터에 썩 나서며 바로 그네에서 내 려오는 춘향의 뒤로 발자국 소리 없이 사뿐사뿐 뛰어가서 목을 쑥 빼며,
 
137
"춘향아!"
 
138
하고 소리소리 질렀다.
 
139
춘향이 깜짝 놀라 그넷줄을 탁 놓고 떨어지는 듯이 땅에 내려 서서 후유하고 한숨을 지며,
 
140
"이 주릴할 녀석이 왜 그다지 소리를 질러? 하마터면 낙 상할 뻔했군나."
 
141
하고 방자를 흘겨 본다.
 
142
방자 능청스럽게 놀라는 모양을 보이며,
 
143
"거 안 되었구나—네가 요새 서방 만나서 거드럭거리고 잘 논단 말은 들었지마는 아직 젖내 나는 계집애가 어느 새 아 기를 밴 줄은 몰랐구나—거 가엾구나."
 
144
하고 고개를 기웃거린다.
 
145
"예끼 망할 녀석! 누가 애기 뱄다니?"
 
146
하고 춘향은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 돌아선다. 방자는 춘향 의 앞으로 따라가며, 지금 낙태할 뻔했다고 안했니? 그러면 배지 아니한 아기를 낙태부터 한단 말이냐—아무려나, 내 딸이 낙태나 아니하면 다행이다.
 
147
"듣기 싫어! 이 망할 녀석이 왜 오늘은 술이 잔뜩 취해 가지고 나를 못 견디게 굴어?"
 
148
하고 춘향은 방자를 피하여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나 방자 는 허리를 구붓하고 이리 왔다가 저리 갔다가 춘향의 가는 길을 막는다. 춘향의 불그레한 얼굴에 이슬땀이 맺히었다.
 
149
"춘향아!"
 
150
하고 방자는 갑자기 점잔을 빼고 불렀다.
 
151
"왜야?"
 
152
하고 춘향의 대답에는 여전히 독살이 있다.
 
153
"얘야 춘향아, 그것은 다 웃는 말이고...... 내가 할 말이 있다."
 
154
하고 방자가 춘향의 곁으로 가까이 간다. 춘향은 방자가 가까이 오니만치 뒤로 물러서며,
 
155
"할 말일 있거든 저만치 서서 하려무나. 내가 귀를 먹었 단 말이냐. 왜 바싹바싹 대들어?"
 
156
"큰일났다."
 
157
하고 방자는 과연 무슨 큰일이나 생긴 듯이 고개를 끄덕뜨 덕 한다.
 
158
"무슨 큰일?"
 
159
하고 춘향도 방자의 말에 주의를 한다.
 
160
"오늘이 오월 단오가 아니냐."
 
161
"그래."
 
162
"오늘이 오월 단오라고 책방 도련님이 광한루 구경을 나 오시어 지금 저기 앉아 계신데, 네가 그네 뛰는 것을 보시 고 그만 눈동자가 곤두박이를 치어서 날더러 너를 불러오라 고 야단이시니 이를 어찌하느냐. 어느 명이라고 거역할 수 는 없고 부득불 잠깐 네가 가서 보아야겠다."
 
163
몽룡이가 자기를 부른다는 말에 춘향은 못마땅한 듯이 눈 초리를 샐쭉 끌어 올리며,
 
164
"얘, 그 말 같지 아니한 소리 말아라. 책방 도련님이 내가 누군 줄 알고 오너라 말아라 한단 말이냐."
 
165
하고 잘 믿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166
방자 한 손을 이마에 대어 볕을 가리우고 한 손을 넌짓 들 어 광한루를 가리키면서,
 
167
"얘 내가 언제 거짓말 하더냐. 네 저기를 바라보아라. 저 기서 남쭉 끝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부채질하는 이 가 책방 도련님이 아니시냐."
 
168
춘향도 방자의 가리키는 편을 바라보았다. 서편으로 기울 어진 볕에 눈이 부시어 자세히는 분간할 수 없어도 방자의 말대로 어떤 소년 하나가 비스듬히 기둥에 기대어 섰는데, 그 차림 차림이 귀한 집 공자일시 분명하고 이곳에 귀공자 라면 책방 도련님일시 분명하다. 책방 도련님이 풍채 좋고 재주 있단 말은 춘향도 들었던 터이라 한 번 보았으면 하는 맘도 없지 아니하건마는 그렇게 부른다고 수월히 갈 리야 있으랴.
 
169
"글쎄 그이가 책방 도련님인지는 모르겠다마는 그이가 나 를 누군 줄 알고 부르신단 말이야. 공연히 말 많고 일 많은 네가 묻지 않는 말을 춘향이니 난향이니 하고 일러바친 게 지."
 
170
"말이야 바로 하지. 네가 춘향이란 말은 내 입으로 나왔 다마는 네 이름도 알기 전에 네 모양만 보고 벌써 혼이 반 은 빠지어 달아나서, 날더러 네가 누군가 알아 올리라 하시 니, 내가 먹을 것이 있어서 내일부터라도 삼문안 구실을 안 다니면 몰라도 어찌 도련님을 그일 수가 있느냐. 그래서 말 이야, 바로 내 입으로 바른 대로 일러 바쳤다."
 
171
하고 방자는 춘향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한층 말소리를 낮추어,
 
172
"얘야, 말이야 바로 책방 도련님이 과연 네 배필이 될 만 한 양반이다. 풍채 좋고 마음 착하고 그러고도 시원시원하 고, 글이야 내가 아느냐마는 글도 잘 하신다더라—밤낮 글만 읽으니 그만치 읽으면 우리 집 도야지놈도 글을 잘못하고는 못 견딜 것이다. 나도 너를 친동생같이 아니 말이지 도련님 말을 잘 들어 보아라—해롭지 아니할라."
 
173
"응. 너 나를 호려내려 드는구나."
 
174
하고 춘향이 방그레 웃더니 다시 정색하고 방자더러,
 
175
"가서 이렇게 도련님께 여쭈어라. 불러 주시는 뜻은 감격 하오나 규중 처자로서 모르는 남자의 전갈 듣고 따라가옵기 는 옛 성현의 훈계에 어그러지니 못 갑니다...... 또 공부하시 는 도련님이 소창을 나오시면 소창이나 하실 것이지 남의 집 처자더러 오너라 말어라 하시는 것이 점잖으신 체면에 어그러지지 않습니까 고—그렇게 가서 여쭈어라. 나는 갈 수 없다."
 
176
하고 칼로 똑 끊는 듯이 말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새침 하고 집으로 들어가 버리고 만다.
 
177
방자는 하도 어이없어서 춘향이가 대문으로 들어가 안보이 도록 얼빠진 듯이 섰다가,
 
178
"허, 그년 참 맵다—사뭇 호초알이로구나."
 
179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두 어깨를 축 처뜨리고 기운없 이 오던 길을 도로 광한루로 건너간다.
 
180
이때에 몽룡은 껄떡껄떡 침만 삼키고 춘향이가 오기만 기 다리다가 춘향은 어디로 가버리고 방자만 어슬렁 어슬렁 기 운없이 돌아옴을 보고 분함을 못 이기어 발로 광한루 마루 를 탕탕 구르며,
 
181
"글쎄, 이 못생긴 놈아! 널더러 춘향이 불러오라고 했지 들여쫓고 올라고 하더냐—저런 못생긴 놈이 어디 또 있담!"
 
182
방자는 무안한 듯이 처분만 기다리는 듯이 허리를 굽히고 비하에 읍하고 서며,
 
183
"소인이 별소리를 다해도 고개 하나 까딱 아니하옵고 욕 만 톡톡히 얻어 먹었읍니다. 도련님께서 진실로 춘향이를 보시려거든 군노 사령을 내보내시어서 붙들어나 오셔야지 여간 전갈로 부르시기나 해가지고는 명년 이때까지 부르시 더라도 춘향이는커녕 난향이도 못 보시리다.—오늘 보니까 그 애의 매서운 양이 사뭇 칼이요 칼."
 
184
하고 실심한 듯이 먼 산을 바라본다.
 
185
방자만 책망하여도 쓸데 없는 줄을 알고 몽룡은 다시 은근 한 어조로,
 
186
"얘, 이리 올라오너라...... 그래 내가 부른다고 했니?"
 
187
"네."
 
188
"무어라든?"
 
189
"가서 이렇게 도련님께 여쭈라고요—."
 
190
"무어라고? 그런데 왜 내게 말을 아니했어?"
 
191
"말씀도 다 안 들으시고 벼락이 나리시니 언제 말씀할 새 가 있소?"
 
192
"그래 내가 잘못했다...... 그래 무에라든?"
 
193
"불러 주시는 뜻은 감격하오나."
 
194
"응, 그래."
 
195
"규중 처자로서 모르는 남자의 전갈 듣고 따라가옵기 는......"
 
196
하고 방자는 말 구절을 잊어버린 듯이 고개를 기웃거리고 머리를 긁는다. 몽룡은 방자가 전하는 춘향의 말을 한 번 입 속으로 외어 보고,
 
197
"응, 그렇지......그리고 또."
 
198
"옛 성현의 훈계에 어그러지니 못갑니다고."
 
199
"흥, 옳은 말이다...... 그러면 춘향이가 글도 읽었느냐?"
 
200
"아마 도련님만치는 읽었지요."
 
201
몽룡은 고개를 끄덕하며,

 
이광수가 쓴 고전소설 일설춘향전 전문입니다. 

춘향전의 기본 줄거리를 유지하고 7권으로 나누어 지은 것인데요. 

살아 있는 듯한 문체가 특징입니다.


일설 춘향전은 연분, 사랑, 이별, 상사, 수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1권 내용만 일단 올려드립니다.
일설 춘향전 전문은 아래의 링크를 클릭해서 볼 수 있습니다.


http://www.davincimap.co.kr/davBase/Source/davSource.jsp?Job=Body&SourID=SOUR001740&Lang=%ED%95%9C%EA%B8%80&Page=6&View=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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